이 글을 창작한 박준 시인께 따봉을 날리며…짧은 글이라 전문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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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동물이 좋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동물이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길에 놓인 끈끈이 쥐덫에 어린 쥐가 달라붙은 것을 보고 그것을 떼어주느라 두 시간이나 늦게 등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장마가 지나간 날에는 집에서 나무젓가락과 작은 그릇을 챙겨들고 나와 웅덩이에 빠진 풍뎅이나, 길을 잃고 아스팔트까지 나온 지렁이를 풀숲으로 옮겨주는 것이 일이자 놀이였습니다. “원래 개는 안 아파”라는 말을 하는 이웃집 주인 대시, 아파 보이는 그 집 개를 동물병원으로 데려간 기억도 있습니다.
문제는 동물을 좋아할수록 사람을 대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눈앞에서 낯선 개가 한 승용차에 부딪쳤습니다.
동물병원으로 데려가려 그 개를 안을 때 차의 창문이 반쯤 내려갔습니다. 이어 운전자는 “너희 개야? 조심히 키워야지”하며 천 원짜리 몇 장을 던지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물론 돌발적인 사고였으니 마냥 그 운전자를 미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떨리는 듯한 목소리와, 지폐를 던지고 나서 황급히 창문을 올리는 그의 표정이 아쉽고 안타깝게만 여겨졌습니다. 차라리 그가 감정의 동요조차 없는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를 미워만 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 돈은 개와 함께 묻어주었습니다.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다 옮겨 적지는 않겠습니다. 분노와 수치의 감정은 이 글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지난 여름의 일은 옮기겠습니다. 제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시골집, 그 바로 옆집에는 지난 늦봄부터 개가 한 마리 묶여 있었습니다. 경계 없이 귀를 뒤로 한껏 젖히며 꼬리를 흔드는 개를 보고 저는 웃었지만 마음은 복잡해졌습니다.
그 집 주인은 키우는 개를 먹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저희 부모님이 처음 이사를 왔을 때에는 왜 당신들은 개를 방에 들이고, 사료에 간식까지 먹이냐며 동물 애호가가 납셨다고 비아냥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집은 키우는 개에게 밥 대신 잔반을 주었고 물도 꾸준히 채워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키운다라는 말보다는 묶어둔다는 말이 더 알맞을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 집에 갈 때마다 개들에게 줄 간식을 사 가곤했는데 언젠가부터 옆집 개의 몫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자의적인 것이지만 ‘누피’라는 이름도 붙여주었습니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스누피라는 캐릭터와 꼭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하지마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돈을 두둑하게 주고 옆집 주인에게 누피를 살 수는 있겠지만 막상 키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님 역시 옆집과의 관계 때문에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한 번씩 만날 때마다 찬물을 한 바가지씩 마시는 누피를 지켜보면서 저의 고민은 더 깊어졌고요. 주변에 키울 만한 사람들을 수소문해보는 사이 칠월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누피와 만났을 때의 장면이 선명합니다. 평소처럼 바가지에 담긴 찬물을 급하게 마시던 누피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 순간에는 연신 흔들던 꼬리도 멈추었습니다. 오 초 정도 되는 짧은 시간, 누피는 정확히 제 눈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누피는 고개를 숙여 물을 마셨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것이고요.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수일 내로 누피를 데려오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후에 갔을 때는 누피는 없고 제가 두고 간 바가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하나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 바가지에는 며칠 내린 소나기로 물이 절반쯤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름비는 짧게 묶여있는 목마른 개들을 위해 내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벌써 여름 같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찬 비는 아직 멀었을 테고요.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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